임진왜란의 알려지지 않은 영웅 - 황진 장군님 :: 신화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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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진왜란의 알려지지 않은 영웅 - 황진 장군님
    역사에 관하여 /인물 2021. 12. 8.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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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하면 대한민국 국민 거의 100%는 우선 성웅 이순신 장군님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순신 장군을 삭탈관직 및 백의종군시킨 선조 그리고 이순신 장군님의 친구로 알려진 유성룡,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끄신 도원수 권율 장군님등을 연상하실 겁니다. 

     

     

    거기에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알려진 한산도대첩, 행주대첩, 진주대첩을 생각하실 거구요.

     

     

     

    그런데 일본측에서는 임진왜란에 대해서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고 합니다.

     

     

    중국을 정복하겠다는 야심에 바탕을 둔 일본정부 최초의 대규모 대외침략 전쟁이었음에도 일본 내부에서 임진왜란은 패배한 전쟁으로 인식하는 점이 작용한 듯합니다.

     

     

    우선 28만의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음에도 일본으로 온전히 살아돌아간 일본군은 8만 정도였고, 특히나 자신들이 조선보다 월등하게 우위일거라고 생각한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님께 완전 박살이 났다는 점에서도 일본역사에서 임진왜란은 그냥 쓱 지나가는 수준입니다. 

     

     

    다만 한가지 재밌는 점은 그래도 일본인들이 임진왜란을 평가할때, 일본 입장에서는 우리가 승리를 거둔 3대 대첩에서 패한 전투보다는 우리에겐 다소 낯선 웅치 이치 전투에서의 패배를 자신들이 조선을 정복하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으로 꼽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역으로 들어가야만 식량을 확보하고 더불어 후방에서 이순신을 압박해서 조선해군을 물리친 후 자신들이 구상한 수륙병진 작전을 실현할 수 있었는데, 바로 일본 육군이 전라도 지역으로 들어가는 두 곳에서의 패배로 인해 그들의 구상이 완전히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역사에서는 웅치 이치 전투를 임진왜란을 통틀어 가장 뼈아픈 전투로 기록하고 있는거 같습니다.

     

     

    오늘은 일본이 가장 뼈아픈 전투로 기억하고 있는 웅치 이치 전투를 승리로 이끄신 황진 장군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황진 장군님과 이치전투 승전비

     

    황진 장군님은 1550년 아버지 황윤공과 남양 방씨 방응성의 딸 사이의 2형제중 차남으로 현재의 전라북도 남원에서 출생하셨습니다.

     

     

    조선 세종대왕때 영의정 황희 정승의 5대 손으로 명문가의 자제분이셨습니다. 1576년 선조9년 별시 무과에 병과 16위로 급제하셨습니다.

     

     

    황윤길 김성일이 일본 사정을 파악하기위해 조선통신사가 되어 일본에 갔을때 황진 장군님도 같이 갔다고 합니다. 직위가 직위인만큼 아마도 호위무사 역할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일본에 다녀온뒤 황진 장군님은 황윤길이 예상한바와 같이 일본이 반드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확신하고 이때부터 무예단련에 집중하셨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황진을 동북현감으로 삼았다. 황진은 무인으로는 문자는 알지 못하자 용략이 있었다. 그는 김성일을 따라 일본에 다녀와 왜변이 장차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매일 공무가 끝나면 곧바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부지런히 익혔다 (선조 수정실록 25권)" 

     

     

    참고로 문자를 알지 못했다는 의미는 정말로 일자무식이란 뜻이 아니라 문관수준의 박식함이 부족했다는 의미입니다. 문자를 모르는 문맹이었다면 무과급제가 불가능했으니까요. 

     

     

    웅치전투가 시작됐을때, 이복남과 정담이 결사항전을 벌였고, 이와중에 정담은 결국 전사하였으나 이복남은 남은 군사를 수습해서, 전주에서 동쪽으로 10여리 떨어진 안덕원으로 후퇴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때 황진 장군님의 군대가 도착해서 일본군의 배후를 공격해서 일본군이 후퇴하게 됐습니다. 즉 일본군은 사실 웅치까지는 돌파했으나 황진 장군님때문에 안덕원을 돌파하지 못했고 그로인해 전주를 지켜내게 된 것입니다.

     

     

    강한집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 왜노들이 전주를 침범하자 공이 말을 달려 안덕원에서 왜노들을 크게 격파하고 우두머리를 활로 쏘아 죽였으니, 이로부터 왜노들이 감히 전주의 경계를 범하지 못하였다"

     

     

    이 전투의 공로로 황진 장군님은 종5품인 훈련원 판관으로 승진을 하셨고, 남은 병사들을 모아서 이치고개로 향했습니다.

     

     

    일본군이 이치에 도착하여 조총을 쏘며 달려들자 황진 장군님은 부하 장수인 공시억

    등과 함께 고지에서 맞서 싸웠고, 다른 부하 장수인 위대기는 매복으로 일본군을 급습하였습니다.

     

     

     

     

    선조실록에서는 이치전투에서 황진 장군님의 활약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 적이 낭떠러지는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은 나무를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쏘는대로 맞지 않는것이 없었다.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병을 대파하였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까지 피비린내가 났다. 이날 황진이 총탄에 맞아 조금 사기가 저하되자 권율이 장사들을 독려하여 계속하게 하였기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왜적들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에 이치전투를 첫째로 쳤다"(선조수정실록 26권)

     

     

    이렇게 황진 장군님이 부상까지 당해가면서 이치 전투에 승리하고 동북으로 돌아가는데 백성들이 나와서는 황진 장군이 아니었다면 어찌 전주가 무사하였겠습니까하고 칭송했다고 합니다.

     

     

    일본승 화안이 조선에 와서 연위사인 이성구에게 자신들이 전쟁중에 가장 크게 패한 곳으로 웅치 이치 전투가 첫째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실록에서도 권율과 함께 이치 전투에서의 황진 장군님의 공을 최고로 꼽았다고 하네요. 이 전투이후 왜군은 전쟁이 끝날때가지 다시는 전라도를 공격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후 충청병사로 승진한 황진 장군님은 1593년 6월 7백명의 부하를 이끌고 진주성으로 들어옵니다. 황진 장군님은 21일부터 28일까지 진주성 방어에 혁혁한 공을 세우십니다.

     

     

    25일에는 직접 의관을 벗어던지고는 백성들과 함께 토산을 쌓아 적을 격퇴시켰고, 28일에는 적이 공격해오자 직접 지휘를 하셔서 대전과를 올리셨습니다.

     

     

    하지만 이날 격퇴한 성벽 밖의 적 동향을 살펴보시던중 시체 속에 숨어있던 왜군 병사 한명이 총을 쏘았고 이때 황진 장군님은 왼쪽 이마를 관통당해 즉사하시면서 생을 마감하게됩니다.

     

     

    진주성 전경

     

    실록에는 황진 장군님의 전사소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란이 있는 이후로 모든 장수 가운데 행군에 법도가 있고 사졸에 솔선하여 옛날 명장의 풍도가 있는 자로는 모두가 황진을 추중하여 으뜸으로 꼽았는데, 재주를 다 발휘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조야에서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선조수정실록 27권) 

     

     

    한편 황진 장군님의 전사소식을 접한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님은 "황진이 죽었으니, 나랏일이 어긋나게 됐다"고 하시면서 탄식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황진 장군님의 공훈과 영웅담을 보면 조선 역사상 육군의 장수로써는 최고의 용장으로 불리워도 손색이 없음에도 너무 젊은 나이(43세)에 순국하셔서 그런지 인지도는 굉장히 낮습니다. 앞으로 황진 장군님의 업적과 무용담이 널리 알려져서 많은 분들께 알려지고 칭송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어설픈 글솜씨로 정리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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