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세계의 영웅 살라딘 :: 신화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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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슬람 세계의 영웅 살라딘
    역사에 관하여 /인물 2019. 2. 15.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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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라딘은 1137년 오늘날의 이라크 트그리트에서 쿠르드족의 귀족인 나즘 앗 딘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나즘 앗 딘은 아들 살라딘을 얻은 직후에 오늘날의 이라크 모술로 가서 한창 세력을 키워 나가던 장기의 휘하로 들어갑니다.

     

     살라딘의 초상화

     

    1146년 장기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누레딘의 휘하에서도 나즘 앗 딘은 계속해서 출세가도를 달립니다. 살라딘은 당시 이슬람세계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다마스쿠스에서 성장하면서 굳건한 이슬람 신앙과 금욕주의적 생활방식을 체득합니다.

     

     

    1163년 살라딘은 숙부인 시르쿠를 수행하여 이집트 원정에 나섭니다. 원정 6년째인 1169년 시르쿠는 카이로에 입성하고 이집트를 정복하지만 불과 두 달여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곧이어 26세의 청년 살라딘이 총독자리를 이어받음으로써 이집트에서 아이유브 왕조의 막이 오르게 됩니다.

     

    살라딘의 카이로 요새

     

     

    1187년 6월 살라딘이 이끄는 무슬림 군은 하틴 전투에서 더위와 갈증으로 무력해진 기독교 군대를 대파하는 엄청난 성과를 올립니다. 이어 기세를 몰아 살라딘은 아크레, 베이루트, 시온 등 기독교 국가의 주요도시를 차례로 점령했고, 1187년 10월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기독교의 성지이기도 하지만 이곳은 한뿌리를 지닌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성지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슬람교의 입장에서는 메카와 메디나 다음가는 성지였으니 이는 아브라함과 여러 예언자의 활동무대였으며 예언자 무함마드가 이곳에서 천상에 다녀왔다고 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1099년 살라딘은 그곳을 방어하던 기독교인과 협상을 벌인 끝에 무혈입성을 하게됩니다. 무슬림측에서 보자면 무려 88년만의 감격적인 탈환이 이루어진 셈입니다. 하지만 무슬림의 예루살렘 탈환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각국은 경악해했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와 그 후임자인 클레멘스 3세가 새로운 십자군 파병을 호소함으로써 여러 군주가 적극적으로 호응했습니다.

     

     

     

     

    그 결과 제3차 십자군 원정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살라딘과 리처드 1세라는 중세 이슬람과 유럽의 두 영웅이 격돌했다는 점에서 또다른 주목을 받았습니다.

     

     

       살라딘 요새

     

     

    살라딘은 탁월한 군사지도자이기도했지만, 동시에 뛰어난 정치가이기도 했습니다. 살라딘은 그 당시의 다른 군주들과는 달리 상당히 관대하고 합리적인 면모를 보여줬습니다. 전투에 임해서는 단호하면서도 교활한 작전을 구사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타협과 외교라는 대안을 적극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의외의 사실이지만 살라딘은 이슬람세계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굉장한 인기가 있었습니다. 십자군을 소재로 한 여러 낭만적인 문학작품에서 살라딘은 종종 리처드 1세의 숙적이면서 동시에 존경할만한 인물로 묘사되곤 했습니다.

     

     

     

    독일의 저명한 작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의 희곡 <현자 나탄>은 살라딘을 지혜와 관용을 겸비한 전제군주의 모범으로 여겼을만큼 살라딘에 대한 유럽의 인식은 매우 긍정적이고 호의적이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살라딘이 비록 기독교와는 적대적 입장이지만, 평소에도 금욕적인 생활을 유지했고, 특히 사유재산이 없었기에 사후 장례준비가 어려웠을만큼 그의 검소함과 청렴함이 유럽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으로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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