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미술에 대한 숭배자 - 폴 고갱 :: 신화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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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시미술에 대한 숭배자 - 폴 고갱
    역사에 관하여 /인물 2019. 3. 6.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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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식중개인으로 살던 어느 평범한 직장인이 직장을 때려치우고 심지어 가족과도 헤어져 35세 늦은 나이에 화가가 되었습니다. 바로 폴 고갱입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세속적 가치를 외면하고 고난과 역경속에서 자신만의 예술을 추구하는데, 폴 고갱 역시 가난과 주변의 몰이해 속에서도 평생 자신의 천재성을 확신하며 보헤미안으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화상>

     

     

    파리에서 태어난 고갱은 나폴레옹 3세 재임당시 정국이 혼란스러워지고 공화파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그의 가족은 페루로 망명을 떠나게 딥니다. 아버지는 항해 도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 누이와 함께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살게됩니다.

     

     

    4년후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상속문제를 매듭짓기위해 다시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중학교에 다니다가 17세에 모든 학업을 마치게됩니다. 이후 대서양 항로를 운항하는 화물선의 선원으로 일했습니다.

     

     

    1871년 어머니의 사망으로 다시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이후 귀스타브 아로사의 영향으로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됩니다. 1876년까지 고갱은 카미유 피사로를 만나 함께 작업을 했으며 휴일을 이용하여 피사로, 폴 세잔과 함께 그림을 그리게됩니다. 이때 그의 그림은 매우 서툴렀고 단조로운 색채를 구사했다고 전해집니다.

     

     

    <타히티의 여인들>

     

     

    1884년 고갱의 가족은 처가가 있는 코펜하겐으로 이주했지만 그곳엣 박대를 당하고 결국 결혼생활도 파경을 맞게됩니다. 1886년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조르주 쇠라 폴 시냐크의 그림에서 색의 표현가능성을 깨닫고 브르타뉴 풍타방에서 색채 연구에 전념합니다.

     

     

     

    이후 그는 아를에서 반 고흐의 요청으로 함께 작업을 하게됩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교우관계는 발작적인 정신착란에 빠진 고흐가 고갱을 찌르려는 사건으로 인해 비극적으로 종지부를 맺습니다. 이후 1887년 마르트니크로 여행을 하는데 이때 찬란한 색채와 관능의 기쁨을 발견하며, 이후 고갱이 그림을 통해 감정을 담는 계기가 됩니다.

     

     

     

    1888년 고갱은 베르나르라는 젊은 화가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필사본, 민속예술을 잘 아는 젊은 예술가였습니다. 이를 통해 새로운 그림의 가능성을 발견한 고갱은 결국 원시적인 자연과 생활을 동경하여 유럽을 버리고 남태평양에 위치한 타히티 섬으로 건너가게됩니다.

     

     

     

    1897년 아내로부터 큰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고갱은 깊은 슬픔에 잠겨 <우리는 어디서 오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라는 대작을 남기게됩니다.

     

     

    그후 자전적 수필을 쓰기도 하고, 원주민편에 서서 식민정책을 비판하며 현지의 관료들과 충돌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원주민들의 순수한 인간성과 열대지방 특유의 원시적인 자연의 힘은 그에게 삶의 의욕을 불러일이키는 원천이었습니다.

     

     

     

                       <이아 오라나 마리아>

     

     

    그러나 1900년이후 심장병과 영양실조등으로 계속 고생하였고, 1903년 심장발작으로 마침내 고집스러웠던 예술가의 생애를 마감하게됩니다.

     

     

    사후 그의 예술세계는 20세기초 두드러진 활동을 한 후세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저줍니다. 피에르 보나르, 에드바르트 뭉크, 파블로 피카소 등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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