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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1988년은 스웨덴 테니스의 최전성기

by 시사맨 2021.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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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에게 1988년은 크게 의미 있는 사건이 2가지 있었습니다. 먼저 87년 12월 16일 있었던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의 취임식이 1988년 2월 25일에 있었고, 그리고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스포츠 행사였던 서울 올림픽이 9월 17일부터 열렸습니다.

 

 

그런데 북구의 바이킹 후예인 스웨덴에게 1988년은 자국의 테니스 역사상 가장 크고 위대한 업적을 이룬 한 해였습니다. 1988년 스웨덴은 흔히 테니스 메이저 대회라고 말하는 4대 그랜드 슬램 대회를 데이비스컵 국가대표인 매츠 빌란데르와 스테판 에드베리를 통해서 모조리 우승하는 기염을 토한 한 해였습니다.

 

 

빌란데르가 호주오픈, 프랑스 오픈, US오픈을 우승하고, 스테판 에드베리가 윔블던을 우승하면서 스웨덴 남자 테니스는 그 해 4대 메이저대회 남자 단식 우승을 모두 석권했습니다. 

 

 

 하드코트에서 대회가 진행된 첫 결승에서 격돌한 빌란데르와 캐시

 

1988년 호주오픈은 한국과도 다소 인연이 있었던 대회였습니다. 직전까지 잔디코트인 멜버른 쿠용스타디움의 시대를 마감하고 야라강이 흐르는 현 멜버른 파크(당시 플린더스 파크)로 장소를 옮겨 하드코트 대회로 모습을 바꿨습니다. 그러면서 대회 공인구도 기존 영국의 슬레진저에서 한국의 낫소 테니스공으로 바꼈습니다. 한국 테니스공이 메이저대회 공인구로 사용된 역사적인 대회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호주오픈은 쿠용 스타디움 시절이었던 앞서 4년간도 스웨덴 테니스의 독무대였습니다. 83년, 84년은 매츠 빌란데르가 우승을 했고, 85년 87년(86년 대회는 대회 기간 일정을 조정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사라짐)은 역시 스웨덴의 스테판 에드베리가 우승을 했습니다. 특히 85년 대회는 결승전에서 빌란데르와 에드베리가 맞붙었던 스웨덴 선수끼리의 결승전이었습니다.

 

 

호주는 호주 건국 200주년 기념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쿠용 스타디움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최신식 경기장을 건설하고 자국 선수였던 패트 캐시의 우승을 위하여 총력을 다했습니다. 직전 87년 결승에서도 캐시가 결승에 올랐지만 에드베리에게 2:3으로 패해 아깝게 준우승에 그쳤습니다. 대회를 잔디코트에서 하드코트로 바꾼후 첫대회 4강전에는 빌란데르 - 에드베리 그리고 또다른 박스에서는 이반 랜들- 패트 캐시가 대결했습니다.

 

 

결과는 빌란데르와 캐시가 각각 준결승에서 승리를 하여 결승에서 만났고, 이번에는 빌란데르가 캐시를 3:2(6/3, 6/7, 3/6, 6/1, 8/6)로 누르고 84년 우승 이후 4년 만에 타이틀을 차지했습니다. 반면 호주의 캐시로서는 87년에 이어 또다시 결승전에서 풀세트 접전 끝에 패하는 쓴맛을 봐야 했습니다.

 

 

프랑스 오픈 결승전후 시상식에서 빌란데르와 르꽁트

 

이어 6월에 있었던 프랑스 오픈 결승전에서는 빌란데르가 프랑스의 앙리 르꽁트를 3:0(7/5, 6/2, 6/1)으로 비교적 가볍게 꺾고 우승했습니다. 작년도 87년 대회 우승자이자 대회 3연패에 도전했던 이반 랜들은 어깨 부상의 여파로 8강전에서 스웨덴의 요나스 스벤슨에게 0:3으로 패해 탈락했습니다. 그리고 결승전 상대였던 르꽁트는 16강에서 독일의 보리스 베커를 3:2로 누르는 대이변을 일으켰습니다.

 

 

 

베커와 랜들이라는 쟁쟁한 경쟁자가 탈락한 덕분에 작년도 준우승자였던 빌란데르는 비교적 수월한 상대인 르꽁트를 만나 다른 대회보다 쉽게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습니다. 빌란데르에게는 기예르모 빌라스를 꺽고 우승한 82년, 이반 랜들을 꺽고 우승한 85년에 이어 세 번째 프랑스오픈 우승이었습니다.

 

 

88년 윔블던 챔피언 스테판 에드베리

 

한 달 후 영국 윔블던으로 자리를 옮겨서  빌란데르는 앞선 두 메이저 대회에서 보여준 절정의 기량을 앞세워  스웨덴 선수로써는 80년 비외른 보리이후 8년만에 윔블던 우승을 노렸지만 8강에서 체코의 밀로슬라브 메시르에게 일격을 당하고 0:3(3/6,1/6,3/6)으로 패해 탈락을 합니다. 이어 메시르는 4강에서 역시 스웨덴의 스테판 에드베리를 만나 1,2세트를 먼저 가져갔습니다. 3세트와 4세트를 에드베리에게 내줬으나 5세트 4:1까지 앞서면서 체코 선수로는 86년, 87년의 이반 랜들에 이어 두 번째로 윔블던 결승에 가나 싶었지만, 에드베리가 믿을 수 없는 대역전극을 펼치며 결승전에 안착합니다.

 

 

 

특히나 비가 잦았던 그해 결승전에서 스테판 에드베리는 비로 인한 잦은 경기 중단으로 인해 컨디션 유지에 애를 먹으며 거기에 짜증까지 내는 바람에 평점심을 잃었던 독일의 보리스 베커를 3:1(4/6, 7/6, 6/4, 6/2)로 누르고 감격의 윔블던 첫 우승을 달성하며, 스웨덴 선수로는 80년 윔블던을 우승한  비외른 보리에 이어 8년만에 윔블던을 품에 안았습니다. 

 

 

 

반면 준결승에서 에드베리에게 세트 스코어 2:0으로 앞서다가 2:3으로 대역전패를 한 체코의 메시르는 88 서울 올림픽 4강전에서 다시 만난 에드베리를 누르고 결승에 진출했고, 결승에서는 미국의 팀 메이요트를 누르고 조국 체코에 처음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테니스 부문에서 금메달을 선사합니다.

 

 

US 오픈 우승후 인터뷰하는 빌란데르와 뒤쪽의 이반 랜들

 

이후 9월 미국 뉴욕으로 이동한 후 다시 힘을 낸 빌란데르는 2회전에서 남아공의 케빈 커렌과 풀세트 접전을 치른 경기를 제외하면 비교적 수월하게 결승까지 올라옵니다. 결승은 체코 출신이지만 미국 국적을 취득한 이반 랜들이었습니다. 빌란데르는 87년 결승에서도 이반 랜들을 만났지만 1:3으로 패했고,  설욕을 벼르며 88년에 다시 만난 경기에서는 풀세트 접전 끝에 3:2(6/4, 4/6, 6/3, 5/7, 6/4)로 랜들을 누르고 스웨덴 선수로써는 최초로 US오픈을 우승하게 됩니다.

 

 

앞서 빌란데르의 선배였던 메이저대회 11관왕이었던 비외른 보리는 무려 4번이나 US오픈 결승에 올랐지만, 지미 코너스(76,78)와 존 매켄로(80,81)에게 번갈아 패하면서 우승은 하지 못했습니다.  빌란데르의 US오픈 우승은 74년 지미 코너스에 이어 한 선수가 한 해 3개의 메이저 대회를 우승하는 대기록이었고, 에드베리의 윔블던 우승으로 인해 한 해 4대 메이저대회를 한 국가의 선수들이 모두 우승하는 대기록을 세우게 됐습니다.

 

 

68년 오픈 시대 이후 현재까지 한 국가의 선수가 4대 메이저대회를 모두 우승한 것은 호주의 로드 레이버가 시즌 그랜들 슬램을 달성한 69년과 에드베리와 빌란데르가 합작으로 달성한 88년 딱 2번뿐입니다. 샘프라스와 애거시라는 쌍두마차를 둔 미국도,  페더러의 스위스도, 나달의 스페인도, 조코비치의 세르비아도 달성하지 못한 대기록입니다.

 

 

하지만 88년이후 에드베리와 빌란데르의 행보는 너무나도 상이해서 빌란데르는 88년 메이저 3관왕을 달성한 이후 끝없는 추락에 추락을 거듭해서 89년에는 50권 밖으로 벗어납니다. 반면 에드베리는 2년 후인 1990년에  비외른 보리(79년, 80년), 빌란데르(88년)에 이어 스웨덴 선수로서는 세 번째로 세계랭킹 1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에드베리는 91년 세계랭킹 1위, 92년 세계랭킹 2위를 기록하며 전성기를 비교적 길게 이어나가게 됩니다.

 

 

70,80년대 스웨덴 테니스의 영광을 이끌었던 3인방이 일궈낸 메이저대회 우승 횟수는 무려 24회나 됩니다(비외른 보리 11회 / 매츠 빌란데르 7회 / 스테판 에드베리 6회) 하지만 이들 이후 메이저 대회를 우승한 스웨덴 선수는 토마스 요한슨이 02년 호주오픈을 우승한 게 전부입니다. 그만큼 찬란했던 스웨덴 테니스의 암흑기가 짙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이후 09년과 10년 프랑스 오픈 결승에 올랐지만 모두 준우승에 그친 로빈 소더링 정도의 활약이 그나마 요근래 가장 두드러진 활약이었던 거 같습니다. 다시 한번 스웨덴 테니스의 부활을 기원하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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